
“감기 걸리면 우유 마시지 마.” 어릴 때 한 번쯤 들어본 말입니다. 우유가 가래를 더 만든다는 이유였죠. 그래서 목이 칼칼할 때면 습관처럼 우유를 멀리하는 분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 상식, 정말 맞는 걸까요? 연구 결과를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꽤 달라집니다.
이 속설, 800년 전에 시작됐다
우유가 가래를 만든다는 믿음은 생각보다 오래됐습니다. 12세기 이집트의 궁정 의사였던 마이모니데스라는 인물이 『천식 논고』라는 책을 쓰면서, “우유는 머리를 막히게 하니 멀리하라”고 기록한 것이 출발점입니다. 중세 시대의 의학 지식이 만들어낸 조언이었죠.
문제는 이 믿음이 현대까지 이어졌다는 겁니다. 미국에서 5천만 부 넘게 팔린 육아서 『스포크 박사의 육아 백과』도 “유제품이 호흡기 감염 시 점액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적고 있고, 동양 전통의학에서도 유제품이 가래를 끈적하게 만든다는 설명이 내려옵니다. 수백 년 동안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반복되다 보니,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겁니다.
실험으로 확인해봤더니
그렇다면 실제로 우유를 마시면 가래가 늘어날까요? 이걸 직접 실험한 연구가 있습니다.
호주 애들레이드대학교 연구팀이 성인 60명에게 감기 바이러스(라이노바이러스-2)를 직접 감염시킨 뒤, 10일 동안 우유 섭취량과 코 분비물의 무게, 호흡기 증상을 매일 기록했습니다. 참가자들은 하루에 우유를 한 잔도 안 마시는 사람부터 11잔까지 마시는 사람까지 다양했습니다.
결과는 명확했습니다. 우유를 많이 마신 사람이나 적게 마신 사람이나, 코 분비물의 양에는 차이가 없었습니다. 기침이나 코막힘 같은 호흡기 증상도 마찬가지였고요. 흥미로운 점은, “우유가 가래를 만든다”고 믿는 사람들이 실제로 기침과 코막힘 증상을 더 많이 보고했지만, 정작 측정된 분비물 양은 다른 사람과 같았다는 겁니다. 믿음이 증상의 ‘느낌’을 키운 셈입니다.
같은 연구팀이 이어서 진행한 후속 실험은 더 재미있습니다. 169명에게 우유와, 우유와 맛·질감이 똑같이 만들어진 두유를 무작위로 나눠 마시게 했습니다. 참가자들은 자기가 뭘 마셨는지 구별하지 못했죠. 300ml를 마신 직후, “목에 뭔가 코팅된 느낌”, “침이 끈적해진 느낌” 같은 반응이 나왔는데, 우유를 마신 그룹과 두유를 마신 그룹 사이에 차이가 없었습니다. 끈적한 느낌은 우유만의 문제가 아니라, 비슷한 질감의 음료라면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이었던 겁니다.
이런 연구들을 종합한 스위스 취리히대학교 알레르기학과의 리뷰 논문도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우유 섭취가 점액 생산을 증가시키거나 천식을 유발한다는 근거는 없다.”
그런데 끈적한 ‘느낌’은 진짜잖아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연구 결과가 그렇다 해도, 우유를 마시면 목이 끈적해지는 느낌은 분명히 있으니까요. 이건 뭘까요?
영국 런던 로열브롬프턴병원의 소아호흡기 전문의 이언 발푸어-린 박사가 이 의문을 정리한 리뷰 논문이 있습니다. 핵심은 우유와 침이 만났을 때 벌어지는 물리적 현상입니다.
우유는 기름방울이 물에 떠 있는 구조인데, 이게 입안의 침과 섞이면 침 속 뮤신이라는 단백질이 기름방울끼리 뭉치게 만듭니다. 쉽게 말해, 우유와 침이 만나면 순간적으로 끈적한 덩어리가 생기는 겁니다. 이 덩어리가 목 안쪽에 얇게 남으면서, 마치 가래가 생긴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킵니다.
실제로 가래가 더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이미 있는 침과 우유가 물리적으로 뭉쳐서 느낌만 바뀐 겁니다. 이 반응은 사람마다 정도가 다른데, 기름방울이 뭉치는 속도와 크기가 개인차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우유를 마셔도 아무 느낌이 없고, 어떤 사람은 곧바로 목이 끈적하다고 느끼는 거죠.
그러면 감기 때 우유 마셔도 괜찮을까?
미국의 대표적 의료기관인 메이오 클리닉은 “감기 때 우유를 마셔도 가래가 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안내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목이 아파서 음식을 먹기 힘들 때, 차가운 우유나 요거트가 열량과 칼슘을 보충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다만, 한 가지 예외는 있습니다. 극소수이지만 진짜 우유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 경우에는 우유를 마신 뒤 두드러기, 구토, 호흡곤란 같은 증상이 함께 나타납니다. 단순히 “목이 끈적하다” 정도가 아니라 전신 반응이 오는 것이죠. 만약 우유를 마실 때마다 이런 증상이 반복된다면, 알레르기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습니다.
800년 된 속설, 이제 내려놓아도 됩니다
정리하면, 우유는 가래를 만들지 않습니다. 다만 입안에서 침과 만나면 잠깐 끈적한 느낌을 줄 수 있고, 이 느낌이 “가래가 생겼다”는 오해로 이어진 겁니다. 800년 전 중세 의사의 경험적 조언이, 현대 연구에서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확인된 셈이죠.
끈적한 느낌 자체가 불쾌하다면 해결법은 간단합니다. 우유를 마신 뒤 물을 한 모금 마시면 입안에 남은 덩어리가 씻겨 내려갑니다. 감기에 걸렸다고 우유를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출처 (6개)
- Pinnock CB, Graham NM, Mylvaganam A, et al. Relationship between milk intake and mucus production in adult volunteers challenged with rhinovirus-2. American Review of Respiratory Disease. 1990;141(2):352-356. doi:10.1164/ajrccm/141.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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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yo Clinic. Cold symptoms: Does drinking milk increase phlegm?. Updated June 13,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