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치, 된장찌개, 요거트… 한국인의 밥상에 발효식품이 빠지는 날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익숙한 음식들이 단순히 입맛을 돋우는 것을 넘어, 하루의 기분과 에너지까지 바꿀 수 있다면 어떨까요? 2025년 영국의 영양 과학 기업 ZOE가 약 6,5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서, 발효식품 섭취를 2주간 늘린 참가자의 47%가 기분 개선을, 56%가 에너지 증가를 보고했습니다. 단 2주 만에,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의 하루가 달라진 겁니다.
비결은 뜻밖에도 ‘장’에 있었습니다.
장과 뇌는 24시간 통화 중이다
우리 몸에는 장과 뇌를 실시간으로 연결하는 통신망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장-뇌 축(gut-brain axis)’이라고 부릅니다. Cleveland Clinic의 해설에 따르면, 장에는 뇌 다음으로 복잡한 신경망인 ‘장신경계’가 자리 잡고 있고, 그 뉴런 수만 5억 개가 넘습니다. 일부 과학자들이 장을 ‘제2의 뇌’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이 둘을 잇는 핵심 통로가 미주신경입니다. 장에서 일어나는 상황이 미주신경을 타고 뇌에 전달되고, 뇌의 반응이 다시 장으로 내려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행복 호르몬’으로 알려진 세로토닌의 약 95%가 뇌가 아닌 장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Harvard Health는 이를 근거로, 장 환경이 나빠지면 기분과 감정에까지 영향이 미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장이 편안하면 뇌도 편안하고, 장이 불편하면 기분도 불편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장 환경을 좌우하는 핵심 요인이 바로 장 속에 사는 수조 개의 미생물, 즉 장내 미생물입니다.
발효식품이 장에서 하는 일
그렇다면 발효식품은 이 장내 미생물에 어떤 변화를 줄까요? 2021년 Stanford 대학교 의과대학이 《Cell》에 발표한 연구가 이에 대한 강력한 근거를 제공합니다.
연구팀은 36명의 건강한 성인을 두 그룹으로 나눠 10주간 각각 발효식품 중심 식단과 고섬유질 식단을 따르게 했습니다. 결과는 분명했습니다. 발효식품 그룹은 장내 미생물의 다양성이 뚜렷하게 증가했고, 혈액에서 측정한 19종의 염증 단백질 수치가 감소했습니다. 그중에는 류마티스 관절염, 제2형 당뇨, 만성 스트레스와 관련된 인터루킨-6(IL-6)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연구를 이끈 Justin Sonnenburg 교수는 “단순한 식단 변화로 건강한 성인의 장내 미생물 구성을 재편할 수 있다는 첫 번째 사례 중 하나”라고 평가했습니다.
2025년에는 더 구체적인 후속 연구도 나왔습니다. Frontiers in Nutrition에 게재된 연구에서 55명의 참가자에게 발효 당근, 발효 콜라비, 김치를 3주간 섭취하게 했더니, 모든 그룹에서 단쇄지방산을 생성하는 유익균인 Anaerostipes가 유의미하게 증가했습니다. 특히 변비가 있거나 최근 항생제를 복용한 참가자들에서 장내 미생물 구성이 건강한 대조군과 비슷해지는 방향으로 변화했습니다.
장내 미생물 다양성이 높아지고 염증이 줄어들면, 장-뇌 축을 통한 신호 전달이 원활해집니다. Cleveland Clinic의 Susan Albers 박사는 “발효식품이 장에 유익한 세균을 공급하면, 기분을 높이는 신경전달물질이 만들어지기 좋은 환경이 조성된다”고 설명합니다. ZOE 연구에서 관찰된 기분 개선과 에너지 증가가 바로 이 메커니즘으로 설명되는 셈입니다.
한국인은 이미 반쯤 하고 있다
Stanford 연구에서 참가자들이 먹은 발효식품 목록을 보면 요거트, 케피어, 김치, 발효 채소, 콤부차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Frontiers in Nutrition 연구에서도 김치가 핵심 실험 식품으로 사용되었고, 미생물 다양성이 가장 높은 발효채소 중 하나로 확인되었습니다. 세계적인 연구자들이 실험실에서 검증하고 있는 그 ‘발효식품’이, 한국인이 매끼 자연스럽게 먹어온 바로 그 음식인 셈입니다.
김치만이 아닙니다. 된장과 청국장은 콩을 발효시키는 과정에서 다양한 유산균과 바실러스균이 생성되고, 이 균들 역시 장내 미생물 생태계에 기여합니다. 다만 한 가지 짚어볼 점이 있습니다. 현대 한국인의 식탁에서 발효식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예전보다 줄고 있고, 시판 제품 중에는 살균 처리되어 살아 있는 미생물이 남아 있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발효식품의 장 건강 효과를 제대로 누리려면, ‘살아 있는 균’이 포함된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얼마나 먹으면 될까
ZOE 연구에서 참가자들은 평소 식단에 하루 평균 2~3회분의 발효식품을 추가했고, 2주 만에 변화를 체감했습니다. 거창한 식단 개조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아침에 요거트 한 컵, 점심에 김치 한 종지, 저녁에 된장찌개 한 그릇 — 이 정도면 하루 3회분에 가깝습니다.
몇 가지 실용적인 팁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요거트는 ‘살아 있는 유산균(live active cultures)’ 표기가 있는 무가당 제품을 고르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 김치나 발효 채소는 가열하지 않고 먹어야 살아 있는 균을 섭취할 수 있습니다. 찌개에 넣는 김치와 별도로, 밥과 함께 바로 먹는 김치를 한 가지 더 곁들이는 것도 방법입니다. 셋째, 처음 시도하거나 평소 섭취량이 적었다면 천천히 늘려가는 것이 좋습니다. Frontiers in Nutrition 연구에서도 참가자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첫째 주 50g, 둘째 주 100g, 셋째 주 150g으로 점진적으로 섭취량을 늘렸습니다.
다만 주의할 점도 있습니다. 김치와 된장에는 나트륨이 상당량 포함되어 있으므로, 고혈압이 있는 분은 양을 조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스타민 불내증이나 특정 소화기 질환이 있는 경우에는 발효식품이 오히려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으니, 의료 전문가와 상의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Cleveland Clinic도 “발효식품이 모든 사람에게 안전한 것은 아니다”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솔직하게 정리하겠습니다. 발효식품은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ZOE 연구에서도 24%는 기분에 변화가 없거나 오히려 나빠졌다고 보고했고, 장 건강은 식이섬유, 수면, 스트레스 관리, 운동 등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한 결과입니다. Harvard Health 역시 “음식만으로 심각한 우울증이나 불안을 치료할 수는 없다”고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그럼에도 과학이 보여주는 방향은 꽤 일관적입니다. 발효식품은 장내 미생물 다양성을 높이고, 염증을 줄이며, 장-뇌 축을 통해 기분과 에너지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발효식품이 냉장고 안에 이미 있다는 것, 이것이 한국인에게 주어진 작은 이점입니다. 오늘 저녁, 김치 한 젓가락을 의식적으로 집어보는 것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출처 (10개)
- ZOE (2025). ZOE study: Fermented food improves mood, energy, and hunger. zoe.com/learn/zoe-study-fermented-food
- ZOE / American Society of Nutrition (2025). Fermented Food Consumption Is Associated With Improvements in Bloating, Hunger, Energy and Mood in the General Population. Current Developments in Nutrition, cdn.nutrition.org/article/S2475-2991(25)02608-3/fulltext
- Wastyk, H. et al. (2021). Gut-microbiota-targeted diets modulate human immune status. Cell, 184(16), 4137–4153. doi:10.1016/j.cell.2021.06.019 — Stanford School of Medicine, med.stanford.edu/news/all-news/2021/07/fermented-food-diet-increases-microbiome-diversity-lowers-inflammation.html
- Frontiers in Nutrition (2025). Impact of fresh and fermented vegetable consumption on gut microbiota. frontiersin.org/journals/nutrition/articles/10.3389/fnut.2025.1623710/full
- Cleveland Clinic (2024). Benefits of Fermented Food for Your Mental Health. newsroom.clevelandclinic.org/2024/03/15/benefits-of-fermented-food-for-your-mental-health
- Cleveland Clinic. What Is the Gut-Brain Connection? my.clevelandclinic.org/health/body/the-gut-brain-connection
- Cleveland Clinic. Serotonin: What Is It, Function & Levels. my.clevelandclinic.org/health/articles/22572-serotonin
- Harvard Health Publishing (2018). Gut feelings: How food affects your mood. health.harvard.edu/blog/gut-feelings-how-food-affects-your-mood-2018120715548
- Harvard Health Publishing (2023). The gut-brain connection. health.harvard.edu/diseases-and-conditions/the-gut-brain-connection
- Yano, J.M. et al. (2015). Indigenous bacteria from the gut microbiota regulate host serotonin biosynthesis. Cell, 161(2), 264–276. — Caltech, caltech.edu/about/news/microbes-help-produce-serotonin-gut-464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