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혈압 약을 먹고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올해 2월, 미국의학협회지(JAMA)에 발표된 대규모 조사 결과는 그 안심을 정면으로 뒤흔듭니다. 고혈압 환자 5명 중 4명이 목표 혈압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고, 더 놀라운 건 관리에 실패한 사람 중 절반 이상이 애초에 약을 먹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숫자는 미국 이야기지만, 우리에게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79%가 실패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
미국 국민건강영양조사(NHANES) 2021~2023년 데이터를 분석한 이 연구에 따르면, 고혈압 환자의 79.1%가 수축기 130mmHg·이완기 80mmHg 미만이라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이 기준은 2025년 미국심장학회(AHA)와 미국심장병학회(ACC)가 공동으로 발표한 최신 가이드라인에서 제시한 수치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맥락을 짚어야 합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혈압 관리 기준은 140/90mmHg이었습니다. 기준선 자체가 10mmHg 낮아진 것이죠. 따라서 79%라는 숫자에는 “이전 기준으로는 합격이었지만 새 기준으로는 미달”인 사람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안심할 이유는 아닙니다. 기준이 엄격해진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130/80 이상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뇌졸중, 심부전, 그리고 최근 강조되는 치매 위험까지 높아진다는 근거가 축적되어 이 기준이 확립되었습니다.
실패의 가장 큰 원인: 약을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
이 연구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관리 실패의 구조입니다. 목표 혈압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 중 61.3%는 혈압약을 복용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약을 먹는데도 안 잡히는 것이 아니라, 약 자체를 먹지 않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들의 프로필은 꽤 뚜렷합니다. 평균 나이 49세로 비교적 젊고, 심혈관질환 고위험군에 해당하는 비율이 33.7%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약을 복용하는 그룹은 평균 62세, 고위험군 비율 71.9%였습니다. 쉽게 말해, “아직 젊으니까”, “별다른 증상이 없으니까”라는 판단 아래 약을 시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연구를 이끈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의 샤키아 하디(Shakia Hardy) 박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약을 먹지 않는 사람 중 65%는 목표 혈압과 10mmHg 이내 차이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약물 치료를 시작하고 생활습관을 교정하면 충분히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놀랍게도 이 그룹의 80% 이상이 건강보험이 있었고,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의료기관도 있었습니다. 접근성이 아니라 인식과 관성이 문제인 셈입니다.
한국에서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서울시 보건소를 이용하는 고혈압 환자를 대상으로 한 국내 조사에서 약을 제대로 복용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 1위는 “증상이 없어서”(42.4%), 2위는 “약 대신 생활습관으로 조절하려고”(27.1%)였습니다. 고혈압의 별명이 ‘침묵의 살인자’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프지 않으니 괜찮다고 느끼지만, 혈관은 조용히 손상되고 있습니다.
약을 먹어도 안 잡히는 사람들
약을 복용 중인데도 혈압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그룹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 연구에서 약을 먹고 있으면서 혈압이 조절되지 않는 환자 중 52.6%는 목표보다 10mmHg 이상, 24.7%는 20mmHg 이상, 10.8%는 30mmHg 이상 높았습니다.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됩니다. 첫째, 복약 순응도 문제입니다. 고혈압 진단 첫해에는 복약 순응도가 거의 100%에 가깝지만, 2년이 지나면 약 60%, 5년 차에는 45%까지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꾸준히 먹어야 효과가 유지되는 약을 중간중간 빼먹거나 아예 중단하는 것이죠. 둘째, 단일 약제에 대한 과도한 의존입니다. 하디 박사는 “아직도 많은 환자가 한 가지 약만으로 치료를 시작하는데, 대부분의 환자에게는 병용 요법이 필요하다는 근거가 이미 충분하다”고 지적합니다. 셋째, 약만 먹고 생활습관은 바꾸지 않는 경우입니다. 짠 음식, 운동 부족, 과도한 음주 같은 요인이 약효를 상쇄합니다.
한국은 괜찮을까
이 데이터를 보면 “미국 얘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의 고혈압 관리 수준은 세계적으로 매우 높은 편입니다. 대한고혈압학회가 발표한 ‘고혈압 팩트시트 2024’에 따르면, 한국의 고혈압 인지율 77%, 치료율 74%, 조절률 59%입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5년 글로벌 고혈압 보고서에서 한국을 “고혈압 관리의 세계적 성공 사례”로 지목하기도 했습니다. 1990년 5%에 불과했던 조절률을 30여 년 만에 59%까지 끌어올린 것은 전 국민 건강보험 체계와 정기 검진 시스템 덕분입니다.
그러나 빈틈은 분명히 있습니다. 20·30대 청년층의 고혈압 인지율은 36%, 치료율 35%, 조절률 33%에 불과합니다. 전체 평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입니다. “고혈압은 나이 든 사람의 병”이라는 고정관념이 가장 위험한 사각지대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한국의 조절률 59%도 기존 기준(140/90mmHg)을 적용한 결과입니다. 만약 미국의 새 기준(130/80mmHg)을 동일하게 적용한다면 한국의 숫자도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바로 할 수 있는 세 가지
이 글을 읽고 “나도 해당되는 건 아닐까?” 싶은 분이 계신다면, 지금 바로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130/80이라는 숫자를 기억해 두세요. 과거에 “140/90 이하니까 정상”이라고 들었더라도, 최신 가이드라인은 더 엄격한 기준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다음 건강검진에서 이 수치와 비교해 보는 것만으로도 자기 점검이 됩니다.
둘째, 가정용 혈압계를 활용해 보세요. 미국심장학회(AHA)는 가정 혈압 측정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습니다. 병원에서 측정한 혈압은 긴장 때문에 실제보다 높거나(백의 고혈압), 반대로 병원에서만 정상인 경우(가면 고혈압)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 기상 후와 저녁 취침 전, 하루 두 번 같은 조건에서 측정하면 자신의 혈압 패턴을 훨씬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셋째, 약에 대한 인식을 바꿔 보세요. 고혈압 약은 “한 번 먹으면 평생 먹어야 하는 무서운 약”이 아니라, 혈관을 보호하고 뇌와 심장을 지키는 일상적인 관리 도구입니다. 하디 박사는 “고혈압 조절을 ‘뇌 보호’라는 프레임으로 바라보면 환자들의 인식이 바뀔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실제로 조절되지 않는 고혈압은 치매 위험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가 지속적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약을 먹는 것은 약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지키는 적극적인 선택입니다.
고혈압은 진단받는 순간이 아니라, 매일 관리하는 과정에서 승부가 갈리는 질환입니다. 5명 중 4명이 실패하는 이유는 병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병을 너무 쉽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출처 (9개)
- Hardy ST, Jaeger BC, Emanuel E, Muntner P. Blood Pressure Above Goal Among US Adults With Hypertension. JAMA. Published online February 2, 2026. doi:10.1001/jama.2025.25657
- 2025 AHA/ACC Guideline for the Prevention, Detection, Evaluation and Management of High Blood Pressure in Adults. Circulation. 2025;152(11):e114-e218. doi:10.1161/CIR.0000000000001356
- MedPage Today. “National data show two-thirds of out-of-range blood pressure is in those not on antihypertensives.” February 2, 2026. https://www.medpagetoday.com/cardiology/hypertension/119700
- HCPLive. “Most US Adults With Uncontrolled Blood Pressure Not Taking Medication, With Shakia Hardy, PhD, MPH.” February 2026. https://join.hcplive.com/view/most-us-adults-with-uncontrolled-blood-pressure-not-taking-medication-with-shakia-hardy-phd-mph
- 대한고혈압학회. Korea Hypertension Fact Sheet 2024. 2024년 11월 발표. https://files-scs.pstatic.net/2025/03/17/IGH6Dx4JH5/2024 고혈압 FACTSHEET_국문 (1).pdf
- 메디게이트뉴스. “국내 고혈압 인구 1300만명…고혈압 인지율, 치료율, 조절률 세계 최고.” 2024년 11월 13일. https://medigatenews.com/news/2976810751
- 메디칼타임즈. “WHO가 본 한국 고혈압 관리 세계 모범국·최고 성공 사례.” 2026년 2월 12일. https://www.medicaltimes.com/Main/News/NewsView.html?ID=1167298
- American Heart Association. “Monitoring Your Blood Pressure at Home.” Updated August 14, 2025. https://www.heart.org/en/health-topics/high-blood-pressure/understanding-blood-pressure-readings/monitoring-your-blood-pressure-at-home
- 서울시 보건소 고혈압 환자 약물치료 순응도 조사. 한국건강증진개발원. https://www.healthpro.or.kr/